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묻다를 읽고 여러가지 나누고 싶은 주제들이 생겨 글을 쓴다. 

이 책은 여러개의 글을 통해서 연재하도록 하겠다.


간략히 설명하여 이 책의 전체 주제는 기독교인으로써 어떻게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였다.

조금 스포일러하자면, 이 책은 이 세상에 고통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써 인간의 삶에서 고통은 왜 존재하며, 이토록 나를 괴롭히고 있는가를 한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나는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사실 기독교에 대한 신학적인 전반적인 지식이 없다면, 읽는데 있어 조금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혼자가 아닌 내용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읽어나가는 것을 추천한다.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 인상 깊게 본 부분을 나누고 싶은데, 



첫번째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바로 사랑하기 위해서다. 


우리에겐 창조자의 설계와 목적을 이해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하려는 목적은 사랑과 관계 안에서(오직 그분 안에서만 발견 가능한) 진정한 본질을 즐기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랑과 관계는 그 완벽한 사랑과 관계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각주:1]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그분과 완벽한 교제에 있었다. 몸에 물이 필요하듯 영혼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자유롭게 그분의 법을 어긴 우리는 영적 갈망을 온전히 채울 기회를 박탈당했다.[각주:2]


이 세상에 허락되어진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가지고 가야 할 전제 조건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위하여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 사랑을 온전히 받으며,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결국 이 땅에서 인간끼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책은 설명한다. 

그것에서 벗어난 삶은 바로 삶의 본질과 목적을 벗어난 삶이고, 사랑이 없이는 결코 온전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바로 고통이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희생과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희생이다. 

시간, 물질, 노력 등의 내가 가진 어떤 것을 타인을 위하여,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었을 때, 

그것을 받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느끼게 되어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온전한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을 기대하여 인간을 창조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랑은 값싸게 주워지는 것이 아니며, 엄청난 값을 치른 후에 얻어지는 것으로, 그 값을 치렀을 때에는 엄청난 보상이 뒤따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젊은 신랑신부가 서로 서약하는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약속에 불과하다고 한다. 

반대로 나이든 부부가 손을 잡고 식물원을 걸어다니는 모습이 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에 대한 약속을 삶으로 증명하고 지켜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여러가지 많은 상황속에서도 변함없이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우리를 붙드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이 지키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중의 최고의 고통이었다. 

십자가는 당시 최고의 고문 기구였으며, 최고의 고통이 수반되는 생명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최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며 살아갈 때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워져 있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 

바로 거기에서 사랑은 정의될 수 있다. 


"희생은 바로 사랑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라는 메시지를 보면서 내 삶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다음글에 이어서 포스팅하겠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묻다 67p 참고 [본문으로]
  2.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묻다.71p [본문으로]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묻다] 책을 읽고 제가 주관적으로 느낀 점들도 함께 공유해드리오니, 

책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궁극적인 목적은 첫번째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라고 소개했다.

이번에는 인간이 가진 죄에 대하여 나누고자 한다. 

 

두번째 인간의 죄에 대한 정의


우리가 깨졌다. 우리의 삶은 깨졌다. 우리는 부서지고 쪼개진 사람들이다. 창조 목적을 어김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의도했던 우리의 모습은 산산히 부서졌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의 깨어짐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각주:1]


죄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죄는 하나님이 의도한 인생의 목적을 자신이 다시 정의하고 그 경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각주:2]


인생에는 목적이 있는데 죄는 그 목적을 위반한 것이다. 고통을 다루는 출발점은 당신과 나의 삶에 목적이 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 우리는 무분별하게 불쑥 퇴어나와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적인 뜻에 따라 이곳에 있다.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밝힌다. 단순한 복종 혹은 아버지에게로 흡수되는 것이 아닌 그분과 나누는 친교에 잇다. 친한 친구 사이처럼 말이다. [각주:3]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자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다른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에 사용하길 원하셨었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데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유증으로 수많은 부정적인 고통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간은 창조 목적을 벗어낫기에, 인간의 삶은 깨어지기 시작했고, 고통을 사랑의 도구가 아닌 그저 고통으로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기 스스로 재정의 하기 시작했고, 처음 창조되었던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사랑의 도구로써의 고통이 아닌, 그저 현상으로써의 고통을 마주하게 되고, 그 고통을 허락한 신을 더욱 증오하게 된 것이다. 

온전한 사랑안에서는 고통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다. 오히려 고통이 있음으로 더욱 큰 사랑과 행복을 경험하게 될 수 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온전한 친교와 사랑을 원하신다. 

그것이 먼저 이루어졌을 때 인간은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하게 되며, 순리대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받고 주고 했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삶을 이루어나갈 때, 내가 살아가는 그 곳이 바로 천국(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닐까...



  1. 하나님앞에서 고통을 묻다 72p [본문으로]
  2. 하나님앞에서 고통을 묻다 72p [본문으로]
  3. 하나님앞에서 고통을 묻다 72p [본문으로]



[신앙서적]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묻다. part 3(고통에 대한 이해-불교, 이슬람, 자연주의)


세번째로 고통에 대한 이해를 불교, 이슬람, 자연주의 세가지로 구분하여, 기독교와는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하여 책은 설명한다. 


1. 불교 : 바라는 것만 없애면,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다. [각주:1]

2. 이슬람 : 무조건적인 복종(순교는 고통을 극복하는 최고의 승리)[각주:2]

3. 자연주의 :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모든 것이 우연)[각주:3]


이번 챕터는 매우 흥미롭고 재미 있었다. 

사실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부분 중 하나는 바로 타종교에 대한 무관심, 배척이다. 

하나의 지식만을 믿고, 그것만이 진리인 듯 살아가는 것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기독교의 복음이 진리라면, 타종교와 비교했을 때도 변하지 않아야 진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챕터에서는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타종교의 시선을 빌려왔다. 


불교는 내가 어떤 것을 바라지 않으면, 고통이 생기지 않는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완전한 무욕의 상태이며, 열반에 올랐을 때는 바라는 것이 없기에, 아무런 고통이 없는 초월의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인간은 결코 어떤것을 바라지 않는 상태에는 절대로 이를 수 없으며, 지금 현제 불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또한 사회로부터 보장받지 못하는 인권을 가진 사람들을 돕기위하여 힘쓰고 있다는 것을 예시로 든다. 그 스님이 바라는 것은 바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인권을 보장받는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며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로 이슬람은 고통은 바로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인과응보라고 하면 되겠다. 예를 들어 도로에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경우, 이슬람의 문화권의 사람들은 사고난 사람을 돕지 않는다고 한다. 교통사고가 난 것은 그 사람이 이전에 저지른 잘못 때문이며, 마땅히 벌을 받을만했기 때문에 받은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비극적인 개념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명백하게 드러난 개념이어서 좀 충격이었다. 

반대로 예수님은 사람이 태어날때 부터 맹인으로 난것이 자기의 죄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있다. 참고바란다. (요 9 :1-34)


세번째로 자연주의는 어떠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글자로 이야기한다면 "그냥" 이다. 

이 세상이 이유없이 그냥 생겨난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연히...

사실, 개인적으로는 자연주의가 가장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또한 개인적으로 만약에 선택할 수 있다면, 가장 선택하고 싶지 않은 이론이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숨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희망도, 사랑도, 꿈도, 그 무엇도... 부모님과 나,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내가 여지껏 살아온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전 세계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지금, 그 누구도 왜 우리가 여기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마치 통제를 벗어난 배처럼 , 멈추지 않고 재난을 향해 기울어 가는 기분이다. 과하게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가운데 인생의 목적은 순전히 생물학적이고 화학적인 용어로 정의 될 것이다. 과학은 모든 것이 거기에서 시작되었고, 그 곳이 목적지라고 정해버릴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생의 목적을 찾은일이야말로 이 악과 고통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모든 접근법의 바탕이 된다 [각주:4]



여러가지 종교들이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왔고, 어려가지 답을 내렸지만. 

나는 여전히 성경이 말하는 고통을 통하여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는 개념이 좋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참 신기하고도, 알면 알수록 놀라운 것인 것 같다..

  1. 하나님앞에서 고통을 묻다 182p [본문으로]
  2. 하나님앞에서 고통을 묻다 183p [본문으로]
  3. 하나님앞에서 고통을 묻다 200p [본문으로]
  4. 하나님앞에서 고통을 묻다 196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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